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삼세영 기획전

2025. 11. 8 - 29


Artist

김원교

Description

김원교 KIM WON GYO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 In Silence, the Resonance Remains》


나에게 평온이란,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작업을 통해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고요함은 단지 소리가 없는 곳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있다.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작고 여린 풀꽃들, 들뜬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한 숨을 쉬게 하는 고미술품의 고요함, 우리 국보의 아름다움은 삶의 고비마다 나를 붙잡아 주었다.


혼자서 딸아이를 키웠고 30년 동안 교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았다. 힘이 들 때 다만 고요히 앉아 나의 관심사를 담담히 그려 나가는 시간들과 인연에 감사하며, 이번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의 주된 소재는 불상과 자연물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오랜 세월 눈여겨보았던 비로자나불이나 반가사유상, 석탑 등이 등장한다. 올봄, 답사를 위해 경주 남산을 오르내렸고 석탑과 석불, 마애불들을 샅샅이 알현했다. 경주를 10년 가까이 오갔지만 늘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리의 전통문화와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학 시절부터 박물관을 자주 찾았다. 삶도, 작업도 버거워질 때 박물관에 다녀오면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가 풀렸고 새로운 영감을 얻어 오곤 했다. 이처럼 종교적 차원을 넘어 우리의 아름다운 자산인 불상을 담담하게 먹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 의미 깊다 생각했고, 주로 수묵 위주의 작업을 하며 색채는 가능한 절제한다. 삼세영 전관에서의 대규모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에 걸맞은 작업량과 밀도감 있는 전시를 구상하는 일에 2년을 보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조각실에서 고요한 불상들을 보고 오면 참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 한 아이의 엄마로, 또 미술 교사로서 30년 교직 생활 동안 기쁨과 보람이 있었으나, 불상의 미소를 바라볼 때 깊은 숨을 쉬며 고된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살면서 이 시기만 지나면 편안해질 줄 알았다.


2020년 퇴직 이후,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며 여러 상황들이 이어졌다. 40여 년간 부모님이 거주하셨던 묵은 짐과 집을 정리하며 심적으로,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 한창이실 때 구입한 자개장과 가구들, 화장대 그리고 부모님의 흑백사진들, 장롱 깊숙이 보관했던 혼수이불과 한복, 구슬 가방 등을 지워 버리기엔 가족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처럼 〈머문 기억〉 시리즈는 시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부모님의 소장품과 자개장 서랍을 액자로 활용한 형식의 작업으로, 그 시절 누군가의 빛나는 기억과 간직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양화에서는 그림이 완성되면 낙관을 본인의 이름이나 호 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나 문구를 새겨 찍는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업인 〈제심징려 齊心澄慮〉는 씨실과 날실이 엇갈리며 직조되듯, 살아가며 맺어 온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며 1년 6개월에 걸친 긴 호흡으로 준비했다. 수묵으로 표현한 모시 조각보는 단순한 형상의 차용이 아닌 인연을 상징한다.


20년 전 즈음 작품을 소장하며 나의 작업 세계에 관심을 가져온 이선이 시인님, 그리고 중견 시인 김정수, 박완호 시인님께서 새로운 작업들을 보고 시를 써 주었다. 어느 날은 취향이 닮은 인연인 이창현 교수님께서 소장 중이던 티베트 불경 몇 장을 선뜻 내어주었다. 낡고 불에 그을린 종이에는 누군가의 지극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염원〉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자 불경을 한지와 배접지 사이에 넣어 은은히 비치도록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어떤 인연이 나에게 다가와 새로운 선연으로 이어질지. 건축과 집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평소 애청하던 EBS ‘건축탐구 집’으로 익숙했던 임형남 소장님의 전시를 방문하게 됐다. 10여 년간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새겨 온 임 소장님과 정성스러운 전각을 마주한 그날의 인연으로, 임 소장님의 낙관을 작품의 여러 지점에 찍었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선연들이 이어져 화폭에 담담히 표현되어 있다.


퇴직 후 6년의 시간이 지났다. 먹을 갈고 고요히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올해의 무더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작업에만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이었다.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미처 펼쳐 보이지 못한 그림을 위해 공간과 벽면을 내어 준 지인들, 늘 힘이 되어 주는 가족, 그리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딸 영은 작가와 은사님, 도반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언제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번 전시에 초대해 주신 삼세영 대표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펼쳐 보인다.


묵연재에서 현천 김원교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삼세영 기획전

Title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2025. 11. 8 - 29

Artist

김원교

Description

김원교 KIM WON GYO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 In Silence, the Resonance Remains》


나에게 평온이란,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작업을 통해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고요함은 단지 소리가 없는 곳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있다.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작고 여린 풀꽃들, 들뜬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한 숨을 쉬게 하는 고미술품의 고요함, 우리 국보의 아름다움은 삶의 고비마다 나를 붙잡아 주었다.


혼자서 딸아이를 키웠고 30년 동안 교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았다. 힘이 들 때 다만 고요히 앉아 나의 관심사를 담담히 그려 나가는 시간들과 인연에 감사하며, 이번 《다만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의 주된 소재는 불상과 자연물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오랜 세월 눈여겨보았던 비로자나불이나 반가사유상, 석탑 등이 등장한다. 올봄, 답사를 위해 경주 남산을 오르내렸고 석탑과 석불, 마애불들을 샅샅이 알현했다. 경주를 10년 가까이 오갔지만 늘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리의 전통문화와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학 시절부터 박물관을 자주 찾았다. 삶도, 작업도 버거워질 때 박물관에 다녀오면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가 풀렸고 새로운 영감을 얻어 오곤 했다. 이처럼 종교적 차원을 넘어 우리의 아름다운 자산인 불상을 담담하게 먹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 의미 깊다 생각했고, 주로 수묵 위주의 작업을 하며 색채는 가능한 절제한다. 삼세영 전관에서의 대규모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에 걸맞은 작업량과 밀도감 있는 전시를 구상하는 일에 2년을 보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조각실에서 고요한 불상들을 보고 오면 참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 한 아이의 엄마로, 또 미술 교사로서 30년 교직 생활 동안 기쁨과 보람이 있었으나, 불상의 미소를 바라볼 때 깊은 숨을 쉬며 고된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살면서 이 시기만 지나면 편안해질 줄 알았다.


2020년 퇴직 이후,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며 여러 상황들이 이어졌다. 40여 년간 부모님이 거주하셨던 묵은 짐과 집을 정리하며 심적으로,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 한창이실 때 구입한 자개장과 가구들, 화장대 그리고 부모님의 흑백사진들, 장롱 깊숙이 보관했던 혼수이불과 한복, 구슬 가방 등을 지워 버리기엔 가족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처럼 〈머문 기억〉 시리즈는 시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부모님의 소장품과 자개장 서랍을 액자로 활용한 형식의 작업으로, 그 시절 누군가의 빛나는 기억과 간직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양화에서는 그림이 완성되면 낙관을 본인의 이름이나 호 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나 문구를 새겨 찍는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업인 〈제심징려 齊心澄慮〉는 씨실과 날실이 엇갈리며 직조되듯, 살아가며 맺어 온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며 1년 6개월에 걸친 긴 호흡으로 준비했다. 수묵으로 표현한 모시 조각보는 단순한 형상의 차용이 아닌 인연을 상징한다.


20년 전 즈음 작품을 소장하며 나의 작업 세계에 관심을 가져온 이선이 시인님, 그리고 중견 시인 김정수, 박완호 시인님께서 새로운 작업들을 보고 시를 써 주었다. 어느 날은 취향이 닮은 인연인 이창현 교수님께서 소장 중이던 티베트 불경 몇 장을 선뜻 내어주었다. 낡고 불에 그을린 종이에는 누군가의 지극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염원〉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자 불경을 한지와 배접지 사이에 넣어 은은히 비치도록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어떤 인연이 나에게 다가와 새로운 선연으로 이어질지. 건축과 집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평소 애청하던 EBS ‘건축탐구 집’으로 익숙했던 임형남 소장님의 전시를 방문하게 됐다. 10여 년간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새겨 온 임 소장님과 정성스러운 전각을 마주한 그날의 인연으로, 임 소장님의 낙관을 작품의 여러 지점에 찍었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선연들이 이어져 화폭에 담담히 표현되어 있다.


퇴직 후 6년의 시간이 지났다. 먹을 갈고 고요히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올해의 무더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작업에만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이었다.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미처 펼쳐 보이지 못한 그림을 위해 공간과 벽면을 내어 준 지인들, 늘 힘이 되어 주는 가족, 그리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딸 영은 작가와 은사님, 도반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언제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번 전시에 초대해 주신 삼세영 대표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펼쳐 보인다.


묵연재에서 현천 김원교